[10월 3주차]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 은중과 상연 🍟 여러분 오랜만이죠! 추석 잘 보내셨나요~?🌝 길고 긴 연휴를 보내고 돌아왔습니다.ㅎㅎ 에너지 충전한 만큼 더욱 알찬 콘텐츠로 찾아뵙겠습니다. 여러분도 즐거운 한가위 보내셨길 바라며... 추운 날씨 감기 조심하세요!🤧 화요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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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날에 엔(Yen)이 전 세계적으로 가장 강력했을 때
그 도시는 이민 온 사람들로 넘쳐흘러
마치 그 옛날에 있었던 '골드러시'와 같았다.
엔을 못적으로 엔을 파내려고 모여드는 도시
그 도시를 이민 온 사람들은 이렇게 불렀다.
'엔 타운'
하지만 일본인들은 자기들의 도시를 그렇게 부르는 이방인들을 거꾸로 '엔 타운'이라 부르며 멸시했다.
열심히 일해 엔을 벌어서 조국으로 돌아가면 부자..
꿈같은 얘기지만 여기는 엔의 천국인 엔 타운
그리고 엔 타운에 살아가고 있는 '엔 타운'들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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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의 공간 '엔 타운'에 대한 내레이션으로 시작하고 끝나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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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호랑나비'로 직역하지 않은 건
한국에선 김흥국 씨한테 밀릴 것 같아서
라는 게 정설 (아님)
*스포일러가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엔 타운💴은 돈을 벌어 꿈을 이루기 위한 사람들이 모여 생긴 도시입니다. 하지만 점차 꿈은 사라지고 돈만 남았죠. 모두가 꿈에 대해 말하지만,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현실. 범죄가 서슴지 않게 발생하고, 아이들이 마약을 하는 등 피폐하게 썩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돈을 많이 벌어 언젠간 부귀영화를 이루고야 말겠다는 꿈이 넘실거리는 이 곳. 하지만 화려함보다 쓸쓸한 색채로 물들어버린 이 곳. 엔 타운은 도시의 명칭이자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기도 합니다.
엔 타운에서 한 여자가 죽었습니다. 엔타운 사람들은 호화로운 장례식 대신 돈💸에 불🔥을 붙여 시신 위에 올려둡니다. 돈과 함께 하늘로 올라가라는 듯이, 이젠 돈에서 해방되라는 듯이 엔타운만의 장례식을 치릅니다.🧎 그리고 그 여자의 딸🧒은 신분도 이름도 없이 떠돌이 신세가 됩니다. 그러다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는 창녀 '그리꼬'🦋에 의해 구출돼 그녀의 동생이 됩니다.
라이브 카페를 차리는 것이 꿈인 '그리꼬'는 큰 오빠 '랑쿠이', 작은 오빠 '랑카이'와 함께 돈을 벌러 고향 상하이를 떠나왔습니다. 하지만 일자리를 구할 수 없어 소매치기를 하며 전전하던 중 '랑카이'가 차에 치여 죽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일본말을 전혀 할 줄 몰랐던 '그리꼬'와 '랑쿠이'는 '랑카이'의 시신에 다가갈 수 없었고, 그렇게 랑카이를 잃어버리면서 셋은 찢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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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꼬 가슴에 있는 호랑나비🦋(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 문신
랑카이는 이름도 국적도 모르는 그냥 엔타운일 뿐이야.
나도 죽으면 그렇게 돼. 엔타운은 모두 다 똑같잖아.
그래서 이 문신을 새긴 거야.
너도 갖고 싶어?
넌 아직 애니깐... 애벌레로 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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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게하...
응, 네 이름이야.
그렇게 소녀는 호랑나비라는 뜻의 '아게하'라는 이름을 갖게 됩니다. 비로소 누군가에게 불릴 무언가가 생긴 거죠.
아게하🐛, 그리꼬🦋, 그리꼬의 남자친구 페이홍🌈은 우연히 죽인 사람(...)의 시체를 처리하다 그의 뱃속에서(.........) 프랭크 시나트라의 'My Way'가 녹음된 테이프를 발견합니다.😨 테이프의 정체는 바로 자기장을 활용해 위조지폐를 만드는 도구...!💰💰💰 세 사람은 그렇게 만든 위조 지폐로 비로소 엔타운을 떠납니다. 그리고 그리꼬는 '엔타운 밴드'를 결성해 가수가 되는데요...! 그들은 과연 돈으로부터 자유로워졌을까요? 비로소 꿈을 이루게 될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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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할 때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그리꼬
1996년 제작된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는 개봉 당시에도 일본 내에서 크게 흥행했지만, 시대를 예견했다는 평가와 함께 2025년의 관객들에게 더 유효한 울림을 줍니다. 마치 30년 후의 세상을 보고 만든 듯, 특정 통화가 세계를 지배하고 그 통화를 얻기 위해 전 세계 사람들이 몰려드는 현대의 풍경이 겹쳐 보이고, 2020년대 문학 예술계를 관통한 디아스포라, 이민자 정서도 담겨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다시 찾으며 2025년에도 재개봉된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엔타운'이라는 공간 자체도 21세기 글로벌 도시들의 축소판입니다. 일본이지만 중국어, 영어 대사가 더 많다는 점에서 세계 곳곳의 차이나타운🥢이 떠오르고요, 각기 다른 배경을 가진 이민자들이 모여 살며 만들어내는 문화적 융합, 그리고 그에 대한 주류 사회의 배척과 혐오까지. 트럼프의 반이민 정책, 유럽의 난민 문제, 한국의 다문화 갈등 등 현대 사회 문제의 중심이 되는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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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국적 없는 도시'라는 가상의 공간을 설정해 정체성과 자본주의라는 소재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는데요.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자본주의적 소외는 30년 전, 아니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존재해왔을 겁니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나가기보다는 국제화, SNS의 발달, 자본주의의 극대화와 함께 갈수록 악화되는 상황을 방치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엔타운 사람들의 삶 속에는 이민자들의 정체성 혼란, 외로움이 한껏 묻어납니다. 어쩌면 위조지폐는 그 자체로 엔타운을 나타내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진짜 지폐를 벌기가 힘들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일본 사람들 속에 섞여 들어가고 싶지만 지폐감별기에 걸러지고 마는 위조지폐👥처럼 변두리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엔타운의 현실😶 같기도 합니다. 그들이 찍어내는 위조지폐는 돈을 벌고 싶은 욕망과 스스로를 '진짜'라 정의내리지 못하는 혼란이 모두 담긴 장치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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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부모는 미국사람이지만 태어난 곳도 자란 곳도 여기 일본이야.
덤으로 일본의 지독한 영어 교육 때문에 나의 영어는 아이 켄또 스피쿠 상태야.
웃기지? 이런 나는 일본 사람? 미국 사람? 우리는 어딜 가도 외국 사람 취급 받아.
위 대사를 친 그리꼬 일당 중 한 명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 저도 이 사진을 찾기 위해 꽤 오래 서치를 해야 했습니다. 영화에는 정말 많은 출연진이 등장하지만 의도적 연출인 건지 이름 하나하나가 뇌리에 박히지는 않았는데요.(제가 그냥 기억력이 좋지 않은 걸지도 모르지만...) 엔타운 사람들, 그리고 지금 대한민국의 수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의 흐릿한 정체성🫥을 보여주듯 말이죠.
그래서,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겉모습은 미국 사람🇺🇸인 이 사람은 미국 사람인가요, 일본 사람인가요? 엔타운 사람인가요? 이 사람은 이래서, 이 경우는 저래서, 사람/상황/경우에 따라 누구는 미국인, 누구는 일본인이라 정의내릴 수 있을까요? 혹은 정의내리는 것이 유의미한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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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중요한 건 영화 내내 흘러나오는 노래, 'My way'의 가사 속에 있는 것 같습니다.
The record shows I tooked the blows
And did it my way
지난 날들이 보여주듯, 나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나만의 방식대로 살아왔어
스스로에게 부여한 이름, 가슴에 새긴 정체성. 낯선 곳에서 의지하며 살아가는 엔타운들을 통해 우리는 공존과 상생으로 한걸음 나아가는 생각보다 간단한 방법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타인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나만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 서로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는 것. 그거면 되는 게 아닐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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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루고 싶은 주제도 많고 전개도 이리저리, 메타포가 지나치게 많아 다소 산만하고 완성도가 높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불완전함마저 엔타운의 분위기, 메시지와 만나 이 영화만의 매력으로 승화시킵니다. 결말에 다다라서야 나비🦋가 되는 아게하🐛의 성숙해가는 서툰 감정을 담아내기 위함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네요.
어디서든 소외감을 느끼기 쉬운 시대인 것 같습니다. 낯선 도시의 혼란, 타인의 얼굴에 비친 나의 위로, 이름이 모호한 자들이 서로를 불러주는 따스함. 디스토피아적 가상 세계관이지만 현실의 저로서도 공감가는 장면들이 정말 많았습니다. 지폐를 불태우는 장면💸🔥은 영화의 마지막에 한 번 더 등장하는데요. 연기가 되어 흩어지는 지폐처럼, 현대인들의, 아니 인류의 갈등과 고민들도 언젠간 허상이 되어 흐려졌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 포스팅을 마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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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비현실적인 이야기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왜 맨날 어른들이 항상 "지금은 모를거야~"라고 하셨었는지 조금은 알겠는 요즘입니다.
집을 정리하다가 10년 전에 읽었던 책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여직 어렴풋이 '문장이 멋있는데 어려운 책' 이미지로만 남아있던 책이 지금은 어떨까 싶어 읽었더니, 이제는 멋지다는 기분보다는 담담해서 안쓰럽다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나이가 먹을수록 머리와 마음이 커지기도 할 테지만 겹겹이 쌓이는 경험 덕에 이야기에 좀 더 '나'를 투영해서 볼 수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은중과 상연>도 그런 이야기입니다. 지금 봤을 때의 기분과, 30대에, 그리고 40대에 다시 보면 그때마다 느끼는 감정이 또 다를 것 같은 그런 이야기.
만약 10대 시절에 봤다면, 어린시절 은중과 상연 서로가 서로가 가진 것에 대해 질투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이해를 십분 하다가도 이후의 장면에서는 그저 '왜 저렇게까지..?'라는 일말의 의심으로 정주행을 끝냈을 것 같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은중의 단단한 심지가 부럽고, 상연의 모습이 마치 내 내면에 숨어 있던 뒤틀린 자아를 민낯 그대로 꺼내서 의인화 한 느낌이라 보면서 낯이 뜨거워지지만, 또 40대에 본다면 은중에 대한 동경보다는 은중에 대한 안쓰러움, 상연에 대한 안쓰러움이 더 우선해서 마음에 들어올 수도 있을 것 같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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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는 줄곧 은중의 시선에서 상연을 바라보는 식으로 흘러갑니다. 사실 '바라본다'기 보다, 계속 눈에 걸리는 상연을 보이기에 '보는' 것에 가깝지만요. 의식하지 않으려해도 계속 시야에 들어오는, 우연이 아니라 상대가 만들어낸 의도적인 참견이라는 점이 참 묘했습니다.
그래서 드라마를 보면서 줄곧 왜 제목이 '상연과 은중'이 아니라 '은중과 상연'일까 궁금했습니다. 굳이 가해자와 피해자 구도와 복잡함의 정도로 단순화해 나누자면, 자기 발생적 감정보다는 꼬이고 꼬인 상연의 감정으로 피해를 보는 피해자 은중의 시선에서 이야기가 진행될까 하고요. 여러 속내가 얽혀 있는 상연의 모습을 제 3자의 시선으로 시청자가 바라보며 '나쁘지만 미워하지 못하는 아이'로 느껴지려면 화자가 나쁜 아이가 아닌 그녀를 바라보는 상대여야한다는 점에서 그랬나, 싶기도 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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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후반부 상연의 한마디, "네가 나를 받아주는구나, 끝내"를 듣고 어쩌면 은중은 마냥 피해자는 아니었겠구나 싶었습니다. 어릴 적 신축 아파트, 짱짱한 배경, 낭만 있던 친오빠 등 외적인 요소들이 은중으로 하여금 상연에 대한 질투를 느끼게 할 법한 요소들을 걷어내면, 은중의 디폴트 자세는 기본적으로 밝습니다. 의리 있고, 사람을 잘 챙깁니다. 어쩌면 '좋은 사람' 축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함께 작업한 감독님과의 작품이 윗측의 결정으로 하루아침에 주인이 바뀌어버릴 마당에도 은중은 자신의 밥벌이를 걸고 함께한 사람에 대한 의리를 지키려고 합니다. 불의에 화내고, 의리를 지키고, '상식'으로 여겨지는 일들을 준수하고 좋아하는 사람과 사랑하고 바람에 화를 내는 지극히 평범하고도 멋진 사람 축에 속합니다.
그렇기에 상연의 '이해 안 되는' 행동에 그녀는 '이해 안 됨'으로 응수합니다. 상연이 은중의 작품을 도둑질해 새 회사를 차렸을 때도 은중은 혼자 분노하지만, 거기까지입니다. 새로운 꿍꿍이를 꾸려 복수를 한다거나 하는 상연식 방식의 복수는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분노 이전에 같은 사람이 되기 싫다는 본능적인 거부가 그녀의 대응 방식을 만들고, 그게 그녀의 삶의 방식이 된 거겠죠. 의도적으로 상처를 내려는데 아무런 타격이 없는 은중이 상연에게는 되려 상처가 됩니다. 게임 캐릭터로 비유하자면, 아이템을 먹이지도 않았는데 원체 쎈캐라 디폴트 값으로도 갑옷으로 무장한 상대가 던지는 화살촉에도 끄떡없는 그런 느낌이랄까요. 되려 상대가 던진 화살촉을 튕겨내 상대에게 맞혀버리는 꼴입니다. 그렇기에 은중은 의도치 않은 가해자이자 피해자로 볼 수 있겠습니다. 하등 공격이 안되는 상대 앞에서 상연은 흑화하게 되는거죠. 시작하면 안 됐던 공격을 그저 멈추면 되는 것을, 계속 자기 자신을 부정만 하다 아파지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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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줌마, 저 나쁜 년인데 한 번만 안아주세요"
상연이 은중에게 돌이키지 못할 잘못을 저지르고서, 은중의 엄마를 찾아가서 하는 말입니다. 은중에게는 닿을 수 없다고 각인된 그녀의 갈증은 끝없는 자기 부정만 부릅니다. 그저 사랑받고 싶었지만, 끝없는 자기 부정으로 상대가 줬던 사랑마저 끝내 파괴해버렸던 상연. 진정으로 원하는 바를 갈구하기 위해서 직시해야할 감정들을 그저 부정하며 한번도 자기 마음을 돌아봐주지 않습니다. 사랑했던 은중에게 차마 하지 못할 말을 은중의 어머니에게 하며 자기 자신을 자학하는 걸 보면 그녀의 외면이 보이는 화려함은 한톨의 자기긍정 없이 만들어진 모래성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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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아프지 않고 내가 누구인지 아는 채로 죽고 싶은 게
그게 그렇게 큰 잘못이고 욕심이야?
적어도 나한테 고통을 거절할 권리는 있지 않아?” -상연
상연은 크게 성공합니다. 제작한 영화들이 줄줄이 히트를 치고, 성수동에 130억 원을 호가하는 건물도 있습니다. 독하게 자신을 배제한 자아 덕이겠지요. 그러다 시한부 판정를 받게 됩니다. 은중에게 스위스로 안락사 하러 가는 길에 동행에 달라고 부탁하죠. 스위스 안락사는 상연이 인생에서 처음으로 자기 자신이 진정으로 원했던 것입니다. 항시 사랑받고 싶지만 받는 사랑을 파괴해버리며 반대로 자학만 하던, 자신이 다다르지 못할 바에는 상대를 끌어내리는 것으로 자신의 자아를 텅 비게 만들어버린 상연이 처음으로 내면을 직시하게 된 순간입니다.
그제서야 상연은 은중을 마주할 여유가 생깁니다. 죽음 앞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직면한 뒤 한 가장 솔직한 선택이 은중에게의 안락사 동행 요청이었으니까요. 보면서 '너무 이기적인거 아니야? 뒷 사람은 어쩌라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다 보고 난 뒤에는 상연의 입장에서는 처음으로 내본 가장 솔직한 마음자 은중을 자신에 마음에 들이며 건넨 사과 같았습니다.
자신의 작품을 도둑질해 승승장구 했던 '나쁜 년'이 자신 앞에 나타나 안락사 동행을 해달라고 하자 어이가 없어 하던 은중도 점차 그것이 그녀의 사과라는 걸 느끼게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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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가달라고 해. 반대로 말하지 말고. 내가 같이 갔으면 좋겠지?”
안락사 당일, 혼자 블루하우스에 가겠다는 상연에 은중이 하는 말입니다. 그러자 상연은 눈물 흘리면서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리고 상연은 은중 앞에서 약물을 맞고 세상을 떠납니다.
드라마를 보면서 엉엉 울면서도 낯이 뜨거웠던 이유는, 앞서 말했듯 상연이 제 내면에 숨어 있는 '나쁜 년'의 실사화 버전 같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갖지 못한 것을, 그것의 가치도 모른 채, 혹은 너무나 쉽게, 당연하게 가지고 있는 상대를 보면 갖지 못한 내 자신에 대한 자책과 동시에 뺏어오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이걸 알아차리면서도 제 자신에 대한 혐오가 솟아오르기에, 스스로, 그리고 사회적인 검열 앞에서 그 마음을 실천으로 옮기지 않습니다. 실천으로 옮겼을 시에 따라올 자기 혐오가 깎아내릴 내 내면이 더 쓰라리다는 걸 은연 중에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어쩔 수 없이 마음에 여유를 만들고, 질투를 희석합니다. 여윳칸을 넓히는 일이야말로 내가 덜 아플 수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혐오의 지속이 가져온 상연의 자기 파멸이 독하다 독해.. 싶으면서도 안쓰럽습니다. 한 번 발 디딘 시작이 마음의 여윳칸을 아예 문 닫아버린 듯 싶었기 때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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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상연을 알아보고 마지막에 서로의 여유를 내주며 마지막을 함께한 모습이 아름다웠습니다. 여유를 내주기에 각자의 내면에 박혀 있던 혐오 조각을 빼낼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상연 은중 모두 꽉 찬 엔딩 같이 느껴졌던 이유입니다.
이렇게 다 썼음에도 사실, 은중이나 상연의 이해 안 가는 행동들도 많습니다. 제 인생도 이해가 안 되는 판국에 이것들을 모두 이해하는 건 사실 불가능 같습니다..ㅎ 어른들 말마따나 이후에 나이가 더 들면, 그 때 다시 정주행하며 이해할 수 있는 영역들이겠죠. 우선 제 자신은 마음 속 여윳칸을 얼마나 강제적으로 만들고 있나 먼저 돌아보며 글 마무리 하겠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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