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프로 자취러 인사드립니다.🙂↕️
오늘은 9년 간의 제 '집 일대기'를 풀어보려고 합니다. 특별한 이벤트도 없던 요즘이라, 별사탕으로 뭘 써야할지 참 고민이 됐는데 생각해보니 이벤트가 없지 않았더라고요. 이벤트라 함은, 인생 최초로 집 꾸미기를 위해 10만 원이 넘는 램프를 구매한 일입니다.💡 항상 '이 집도 금방 뜰 곳'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온 제게 '최저가'가 아닌 미적 요소가 다분히 곁들여진 제품을 구매한다는 것은 엄청난 이벤트였습니다.
저는 17살부터 25살까지 인생 1/3을 자취하며 살았는데요, 항상 '나는 여기를 금방 뜰 거니까'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당연히 모든 가전이나 생필품 구매는 다음 이사 때 쉽게 내다 버릴 수 있는 가벼운 '최저가' 물건들로 샀고요. 튼튼한 나무 서랍보다는 조립해서 버리기 쉬운 플라스틱 서랍을, 커다란 후라이팬이랑 냄비를 동시에 사기보다는 원샷 투킬 가능한 넙데데한 뚝배기를 샀습니다. 온전한 내 공간이 아니니 굳이 거금을 들여 집을 꾸밀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도 그럴 것이 제 자취 공간을 나열해보자면 이렇기 때문인데요.
🛖기숙사 3년
🛖학교 5초 컷 원룸 2년 (진짜임. 창문 열면 강의실 학생이랑 아이컨택 가능, but 바퀴 출몰)
🛖하숙방 1년 반
🛖원룸 2년 좀 넘게 (거리를 포기하고 심리적 안정을 찾은 곳)
항상 정착하지 않고 짧게짧게 메뚜기 생활을 하다보니 더 가성비에 집착하게 된 것 같습니다.
공간 이야기가 나온 김에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려볼게요.
1. 기숙사 3년
제 기억상 4,6,8인실이 있었는데, 저는 4인실, 6인실을 써봤습니다. 방은 6개월마다 교체되고, 화장실이랑 샤워실은 공용이고요. 개인에게 할당된 공간은 이층 침대 중 한 칸이랑 길쭉이 옷장 한 칸이었는데요. 저는 치우기가 귀찮아서 꾸미기 대신 좋아하는 걸 '쌓아두기'를 택했습니다. 제 서랍장 안에는 항상 초코파이, 하리보, 나나콘 등 과자들이 채워져있었습니다. (나중에는 단체 과자 공구 총대 맨 인간 됨) 그게 전부였네요, 기숙사 3년 동안의 제 공간 꾸미기는요.
2. 5초 컷 원룸 2년
처음으로 혼자 살았던 집입니다. 잠자리나 소음, 냄새 등에 둔하고 극강의 게으름이 몸을 지배하는 저는 학교에서 5초 컷이라는 부동산 아저씨 말에 덥석 이 집으로 결정했습니다. 정말로 창문 열면 등교하는 학생들이 보이고, 강의 시작 10분 전에 일어나도 여유롭게 등교할 수 있는 거리였습니다. 새벽 4시까지 들리는 술에 젖은 청춘의 고성방가? 별 타격 없었고요. 한껏 들떠서 예쁜 침구류, 분위기 조성의 8할을 담당하는 키다리 램프 등을 알아봤었는데 말이죠...
화장실에서 아가 바퀴벌레를 마주쳤습니다. 그 친구도 거대한 저를 보고 얼었더라고요.🥶 서로 언 채로 한 1분 있었나, 바로 집 나와서 세스코를 부른 뒤로 제 머릿속에서 이 집은 더 이상 제 집이 아니었습니다. 한 번 바퀴가 나왔다면, 결국 눈에 안 보여도 바퀴와 동거를 하하고 있는 것임을 너무나도 잘 알았기 때문이죠. 여튼 그러다 계약이 만료되고, 냉큼 집을 나왔습니다. 뒤돌아 생각해보니 상가 1층이자 집 입구에서 가래침을 뱉고 담배 피는 아저씨들이 너무 많았던 기억이 납니다.🚬
3. 하숙방 1년 반
딱 6개월만 살 계획으로 계약했던 하숙방. 일층은 위험하니, 일층 방 월세에 5만 원 더 얹어서 2층 방으로 계약을 했습니다. 열쇠로 방을 여는 구조라 열쇠 까먹고 집에 못들어갈 뻔한 적이 일단 많았고요, 겨우 들어오면 계단에서 바퀴 벌레 사체와 천장에서 죽은 채로 저를 바라보는 매미 사체를 마주했습니다. 방에서는 나프탈렌 냄새가 배어 있어서 항상 외출할 때 옷에 나프탈렌 냄새가 배어 있지는 않나 확인했고요.😅
사실 학교랑 거리도 가깝고, 주인 아주머니도 정말 좋은 분이셨으며 6개월 살 건데 이래저래 귀찮은 사항도 없다는 점에서 만족스럽게 살았습니다. 가는 길에 있는 벌레야 제가 눈 감고 안 보면 되는 거니까요. 그런데 이게 웬 걸, 코로나가 터지고 일정이 꼬이면서 저는 여기에 꼬박 1년을 더 살게 됐습니다. 그럼에도 생각했어요, 곧 뜰 건데 아무것도 사지말자. 여기는 내 집이 아니다. 여기는 내 집이 아니다...😩
4. 코~지한 원룸 2년 좀 넘게
나이가 좀 드니 세상살이에서 귀찮음을 포기하면 선택 폭이 넓어진다는 것을 체감했습니다. 학교와의 거리를 포기하니 세상에, 훨씬 저렴한 가격에 호텔급 (제 기준에서ㅎ) 원룸에 살 수 있게 됐습니다. 얼굴은 모르지만, 벽 넘어 울리는 서로의 알람 소리를 듣고 못 듣는 서로를 위해 방 벽을 두드려 깨워주는 이웃도 생겼고요, 바로 앞에 아파트가 들어서서 함께 들어온 24시 이마트처럼 편의시설 덕도 톡톡히 봤습니다. 그럼에도 현생을 사느라 바빴고, 진짜 취업을 하면 다른 곳으로 이사갈 텐데, 그 때 꾸미자!는 생각으로 상상으로만 공간을 그리고 실행은 못했습니다.
🏠🏠🏡🏘️🏚️🛖
이렇게 살다가 자취 생활을 청산하고 본가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1년이 넘으니, 좋은 말로는 한결 같고 반대 말로는 변화가 없어 지루한 제 방에 질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평생 살다가는 저만의 공간은 어떤 모습인지도 모른 채로 죽겠구나, 싶더라고요. 머리가 딩! 울렸습니다.
마침 침대에 누워서 책을 보자니 천장 조명 때문에 눈이 피로한 게 크게 느껴져 이때다! 싶어 키다리 조명을 바로 구매했습니다. 조도도 조절 가능하고, 조명갓은 진 초록색으로 나름 운치 있는 디자인으로요. 조명 하나 놨을 뿐인데 나를 위해 대단한 무언가를 해준 느낌이 들었는데, 동시에 뿌듯하다 갑자기 조금 서글퍼지더군요. 정 준 가구가 있으면 그걸 내가 어디에 있든 함께 데리고 다니면 되는 건데, 매 순간 '다음에'만 외치다 9년을 공허하게 보낸 것만 같았기 때문입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렇게 일회성으로 샀던 뚝배기, 플라스틱 서랍장, 미니 포트, 거치용 거울 등은 이동할 때마다 하나씩 버리다보니 이제는 흔적도 없이 다 버려졌습니다. 함께했던 시간들도 통으로 사라진 것만 같은 느낌이 듭니다.🥹 언제가 될 지 모르는 '그 날'을 위해서 조금만, 조금만 하며 보낸 9년, 약 2555일이 허공으로 증발한 것만 같은 느낌이랄까요. 처음 홀로 살 때부터 나중에 사겠다고 벼르고 있던 램프를 그 때 샀더라면 지금까지 저와 함께해 수많은 시간이 이미 배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오늘을 위한 행복을 어느정도 좇고 사는 것이 궁극적으로 시간과 추억과 동시간에 공존하는 행복을 모두 잡는 길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도 무슨 이유에서건 '일단 다음에'를 외치지 말고, 한번 해보시면 어떨지요. 당장은 인스턴트 행복🍔 이라고 여겨질지 몰라도 누가 압니까. 그 인스턴트 행복이 당신과 함께 장수할 행복이 될지! 👵🏻🧓🏻 |